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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년 동안 미뤄온 북한인권법 제정은 북한주민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 [인지연 북통모 대표] facebook twitter me2day yozm
icon트위터노출 : 27,813  |   2016-01-11 17:59:28  |   마이뉴스

10년 동안 미뤄온 북한인권법 제정은 북한주민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

 

- 번역가로 살던 내가 북한인권 문제에 뛰어든 이유




인지연 <북한인권법통과를위한모임 대표, 자유한국청년회 의장>

 

 

요 며칠이 나에게 꿈결과도 같다. 김정은 정권을 국제사법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회부하는 내용의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새누리당의 통합된 북한인권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요지부동이고 꿈적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국회가 10년이 지난 이제야, 국제사회의 큰 목소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광화문 거리에서 100일간 매일 기도하면서 ‘북한인권법 제정하라!’를 외쳐온 내게 이 순간은 꿈이 이루어지기 직전이다.


누구는 묻는다. 당신은 왜 언제부터 북한인권에 관심을 가졌느냐고? 왜 북한인권법에 미쳤느냐고?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시작이 있었다. 그 시작은 대단히 극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의 일상 중 어느 날 문득 조용히 다가왔고, 또한 그렇게 사라지는 듯도 했다. 그 시작이 내 인생 전체의 방향과 비전이 되고 지금까지 달려오게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 인생 바꿔놓은, 아버지와 함께 관람한 뮤지컬 ‘요덕 스토리’


2006년 4월, 아버지와 함께 뮤지컬 한 편을 보러 갔다. 내 일생의 영웅이신 아버지(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현재 ‘뉴데일리’회장인 인보길 씨를 말함-편집자)가 단 둘이 뮤지컬 보러 가자 하시니, 살짝 들떴고 뮤지컬보다는 끝난 후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더 마음을 썼다. 뮤지컬은 생소하게도 탈북자 감독이 연출한 ‘요덕 스토리’였다.


그때까지 일상에 치여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있기도 했던 나였기에 탈북자가 연출한 북한에 관한 뮤지컬에 대해 큰 기대가 없었다. 뮤지컬을 다 보고 난 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단, 초등학교 시절 반공교육을 받았던 세대인 내가 느꼈던 것은 “아. 북한은 아직껏 저 지경이야?”란 놀람과 약간의 참담함이 기억난다.


‘요덕 스토리’를 본 후 그냥 지나쳤다면 난 지금까지 그냥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다소 특별한 뮤지컬을 본 것이 마음에 남아서, 다니는 교회에서 펴내는 잡지에 그걸 소재로 한 감상문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감상문을 쓰려하니, 그 사안에 대해 추가로 조사를 하게 되고 탈북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던 강철환, 탈북자의 미국 입국, 탈북자 선교단체 등에 대한 사실을 좀더 알게 되었다. 잡지에 감상문을 기고하고도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우연일 리 없게도 내 마음에서 요덕스토리, 탈북자가 좀처럼 떠나지 않았고, 나는 한 탈북자인권단체에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당시 근근이 벌이나 하는 영어번역가였던 나였다. 자원봉사를 하는 단체의 대표님에게 오는 서신들의 번역을 도와드렸다. 깜짝 놀랐다. 네덜란드, 브라질 등 그 먼 곳에서 탈북자를 돕고 싶다고, 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대표님에게 편지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지구촌 사람들의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과, 기꺼이 내미는 손길을 확인하면서 그동안 이 사안에 무심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우리들의 북한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뮤지컬 관람과, 이후 이어진 일련의 일들이 분단국가인 우리의 상황과,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의 계기였다.


북한인권 개선에 기여하기 위해 미국변호사의 꿈도 이루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상황의 나는 정상국가의 국민이 아니며, 거의 악마적 체제인 북한 당국의 억압 때문에 기본적 인권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북한주민들에 대한 관심을 품게 된 것이다. 이후 번역 자원봉사를 하면서,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에서 그 아이들에게 대한민국 사회를 가르치면서,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북한인권 개선과 통일에 개입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후 통일한국 시대에 대한 비전을, 북한인권 개선에 기여하는 변호사로서의 꿈까지 품게 됐다. 나에게 있어 그 비전을 실현시켜줄 토대는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 국제법률대학원이었다. 한국변호사 과정이 아닌 미국변호사 교육과정의 한동국제법률대학원을 선택해 입학했다. 그리고 그곳은 내가 나의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는 축복의 자리였다. 


LANK(북한인권및개발법학회, Legal Association for North Korean Human Rights and Development)라는 법률대학원 안의 지극히 작은 북한인권동아리의 대표가 되었을 때, 나는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이제 무엇이든 도모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했다. 그리고는 포항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서울 시청광장의 사용 신청서를 시청에 제출했다. 광우병 집회, 민노총집회들만이 차지하는 서울 시청광장 한복판에서 ‘북한인권 개선’을 외치는 것이 나의 소임이라고 판단했다. 2011년 8월 20일 북한인권청년문화제 ‘8월의 편지’ 기획, 진행한 것은 그런 배경이었다.


그 행사 당일, 민노총은 대규모집회를 그 서울시청광장에서 진행하고 싶어 했고 결국 우리의 문화제 옆에 불법무대를 설치해서 집회를 강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김정일리아’란 북한인권상황을 비판하는 영화의 상영을 전깃줄을 끊어 방해함으로써, 우리 행사는 민노총에 의해 중단되었지만, 내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재확인했다.


‘북한인권법’은 북한주민을 살리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


그 후,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오길남 박사님을 만나게 되고 그를 돕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제네바에 있는 UN 인권최고대표부(UN OHCHR)의 인턴으로 일하면서 국제사회 안에서 북한인권에 대한 남다른 인식과 관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2012년 여름에 로스쿨 학생에 불과한 나에게 도와달라고 찾아오신 시민 한 분이 있었는데, 그는 1969년 대한항공기 납북사건의 피해자, 여전히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황원 씨의 아들(황인철 씨)이었다. 그를 돕기 위해 각종 포럼을 개최하고 함께 런던으로 제네바로 국제캠페인을 떠나 제네바 북한대표부 앞에서 북한의 김정은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일도 맡았다.

    
세계인권선언문(UDHR,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이 몇 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지 아시는가? 30개 조항이다. 읽어본 적이 있는가? 모든 조항은 ‘인간은’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보편적이고 당연한 권리가 열거되어 있다. 주어를 ‘북한 주민은’으로 바꿔서 선언문을 구성해봤다. “북한주민은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났다...” 처음부터 말이 막힌다. 북한주민은 ‘인간’이 아닌 것일까. ‘북한인권선언의 날’을 지정해서 ‘북한인권선언문’을 구성하면서 목이 메었다. 

‘북한인권법’은 북한주민을 살리기 위한 기본 양심의 행동이자 도리이다. 제도적 뒷받침 없이 일관되고 지속적인 북한인권 개선 활동을 기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금도 김정은 정권 하에서 죽어가는 북한주민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최소 노력이 바로 북한인권법 제정이다! 자유통일의 시작은 북한인권법 제정임을 기억하자. 유엔의 움직임에 따라 집권 여당과 야당 모두 10년 간 묵혀온 이 법안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됐다고 하는데, 그들에 대한 도덕적 압박은 지금부터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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